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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천문학

유럽의 천문학 Part. 1

by 녹스연구소장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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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밤하늘

 

  유럽 천문학은 중세 전반기에 정체되고 심지어 후퇴했지만 후반기에 이르러 서서히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1,000여 년에 이르는 중세 시대는 그야말로 유럽 천문학의 암흑기였다. 서기 4세기 이후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로마 제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폭압 정치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켜 마침내 476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에 따라 유럽 각지에는 수많은 왕국이 탄생했다. 동시에 기독교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새로 탄생한 군주 국가는 대부분 정교일치, 신학지상의 왕국이었다. 이처럼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된 왕국에서 고대 그리스의 훌륭한 천문학 이론은 무시되었고 <성경> 및 교회 성직자가 <성경>의 교리를 번역한 책은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유일한 합법적 서적이 되었다. 당시 서유럽 사람들은 그리스 과학자의 학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지구가 공처럼 생겼다는 주장마저 이단으로 몰렸다. 그 대신 성경의 내용이 우주 체계의 새로운 근거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 천문학이 여전히 고등 교육의 필수 과목이었던 이유는 주로 교회 신도에게 부활절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구약전서·이사야> 40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신학자들은 시적인 정취가 가득한 이 문학 언어를 '아치 모양의 하늘이 원반 모양으로 생긴 대지를 덮고 있는 우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6세기의 이집트 신학자 코스마스는 12권으로 된 <그리스도교의 지지학>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기독교 성전의 구조를 이용하여 우주를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은 자연경제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수공업의 생산성도 매우 낮았으므로 이런 주장에 반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세 초기에 엄밀한 과학에 기반을 둔 천문학이 냉대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점술, 예언 등을 기반으로 하는 점성술이 학자들의 주요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물론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로마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점성술의 예언을 깊이 받아들이고 신봉했다. 가령 서기 1세기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 한 점성술사가 별과 인간사 사이에 대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책을 썼는데, 이것이 나중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중세 유럽의 유명한 '황도 12궁과 인체의 대응설'로 발전했다.

  14세기 독일의 점성술에 관한 한 필사본에는 황도 12궁과 이들이 관장하는 인체의 각 부위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즉, 양자리-머리, 황소자리-목, 쌍둥이자리-두 어깨, 게자리-가슴과 위, 사자자리-심장과 등, 처녀자리-배와 내장, 천칭자리-엉덩이, 전갈자리-방광과 생식기, 궁수자리-대퇴부, 염소자리-무릎, 물병자리-소퇴부, 물고기자리-발이다.

  유럽의 점성술은 중세에 이르러 더욱 성행했다. 즉, 인간의 모든 활동이 점성술사의 말이나 계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한 일부 점성술사는 국왕의 최고 고문이 되기도 했으며, 국가의 주요 정치 활동을 결정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점성술사의 예언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로미 교황은 대학에 점성술 과목을 개설하도록 직접 명을 내리기도 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이 고대 그리스와 아라비아 천문학을 다시 접하게 된 계기는 뜻밖에 10~13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원정이었다. 시간 순서대로 보면 고대 그리스와 아라비아 천문학은 다음 세 가지 방향을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첫 번째는 아라비아가 통치한 스페인이었다. 1085년 십자군이 스페인의 톨레도를 점령했고 아랍어로 번역한 고대 그리스의 과학 서적이 유럽 언어로 재차 번역되었다. 또 교회 측이 톨레도에 번역학교를 세우자 유럽의 많은 학자가 이곳에 몰려들어 이슬람의 과학 지식을 배웠다. 이탈리아의 제라르드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포함한 서적 80여 권을 번역했다.

  두 번째는 시칠리아 섬을 통해서였다. 이곳 대부분 주민은 라틴어와 아랍어,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그중 일부 사람은 유대인이었다. 1091년 시칠리아 섬이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아라비아 천문학 서적의 일부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이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수많은 그리스 학자가 서쪽으로 탈출한 경우이다. 아울러 수력 터빈, 물레, 베틀, 마전기(생베나  무명을 삶거나 빨아 볕에 말려서 희게 만드는 기계), 수력 송풍기 등 많은 기계가 발명되었고 야금, 유리 및 도자기 제조, 조선업 등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서유럽에서는 초기 기술 혁명이 발생했다. 그 결과 실험 과학이 탄생하고 발전했으며 역학, 화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지식이 유입되었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관측 천문학도 크게 발전했다. 예를 들어 뉘른베르크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천문 관측 기기 제조 공장이 생겼는데, 많은 우수한 수공업자가 이곳에서 아스트롤라베, 해시계, 자오의, 상한의, 혼천의와 같은 고대 천문 계기를 생산하여 관측 천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뿐만 아니라 항해 산업이 발전하면서 해와 달, 별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관측하는 계기가 필요했고, 이것 역시 관측 천문학의 발전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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