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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천문학

유럽의 천문학 Part. 2

by 녹스연구소장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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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부터 유럽 각국에는 대학이 생겼다. 당시 대학은 세 종류였다. 첫 번째 유형은 옥스퍼드(12세기 초에 창설)와 케임브리지 대학(1209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리되었음)과 같이 교회가 세운 대학이다. 두 번째는 파두아 대학과 같은 공립 대학으로 학생이 선출한 총장이 학교 업무를 총괄했다. 세 번째는 나폴리 대학과 같은 국립대학으로 국왕이 교황의 인가를 얻어 세웠다. 이들 대학은 고대 그리스의 문헌을 강의하는 커리큘럼을 속속 개설했는데 여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지식도 포함되었다. 

  그리스의 고전 과학이 유럽에 빠르게 확산되자 기독교계는 더 이상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1227년 로마 교황청의 그레고리 9세는 기존의 방식 대신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여 사상 통제에 나섰다. 그는 먼저 1230년 로마에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자를 잔혹하게 박해했다. 또한 1231년에 고대 그리스 철학과 자연과학 서적을 재차 수정하고 주석을 달도록 명했다. 가령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학설과 신학을 접목하여 유명한 '제1원동자의 논증'을 발표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는 모든 천체는 지구 주위를 돈다고 우주의 체계를 설명한다. 또 지구에 가장 가까운 천체는 달이고 이어 순서대로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항성 그리고 종동천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이른바 9중천설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의 운행에 대해서도 태양이나 달과 마찬가지로 주원-주전원 및 이심원 이론을 가지고 설명했다. 하지만 관측의 정밀도가 높아지고 관측 자료가 많아지면서 발견되는 행성의 불규칙 운동도 더 많아지고 더욱 복잡해졌다. 이런 복잡한 행성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주원의 한쪽에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주원을 따라 움직이는 주전원의 중심 역시 불균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등점'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등점에서 주전원의 중심까지 거리는 지구에서 주원의 중심까지 거리와 같지만 방향은 서로 반대이다. 또 주전원의 중심은 등점에서 볼 때 등속 운동을 한다고 가정했다. 이로써 천체가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완벽한 조화'가 유지되었고 천체의 운행 궤도를 최대한 관측 결과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기독교는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했고, 땅 위의 만물을 관리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 교리에 따르면 지구는 창조주께서 만드신 인간이 살아갈 땅이므로 지구가 우주 공간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바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교리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는 기독교의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는 유럽 천문학, 나아가 근대 천문학 발전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이후 중세의 유럽 천문학은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알폰소 10세는 과학을 숭상하는 학자였으며, 즉위하기 전부터 이미 학자들에게 아랍어로 된 과학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적극 독려했다. 또 아라비아 학자 및 유대 학자를 모아 알 자르칼리의 <툴레도 천문표>를 수정하도록 지시했고, 즉위하자마자 이를 <알폰소 목록>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했다. <알폰소 목록>은 유럽에서 널리 전파되었고 이후 200년간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일설에는 알폰소 10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가 너무 복잡하고 조화롭지 못한 것에 불만을 터뜨리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내게 자문을 구했다면 하늘의 질서는 좀 더 질서 정연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이 발언으로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렸고 결국 1282년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13세기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데 사크로보스코는 1220년에 발표한 <천구론>에서 지면천문학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여 천문학이 유럽에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번역본이 있으며 17세기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15세기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천문학자이자 빈 대학 교수인 게오르크 포이어바흐는 <천구론>을 보완하기 위해 <천문학 편람>을 썼다. 또 <행성의 새 이론>을 저술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이론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책은 이후 200여 년간 56판을 찍었다. 그의 제자이자 파트너인 레기오몬타누스는 뉘른베르크에 천문대를 세우고 1475~1506년의 항해 달력을 편찬했다. 이 달력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사용되었다.

  당시 자본 축적에 몰두하고 있던 유럽인들은 동양의 부와 황금에 큰 매력을 느꼈다. 따라서 신항로 개척을 서둘렀고 이는 유명한 '대항해 시대'를 여는 촉매제가 되었다. 1497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남서부 해안에 도착했다. 1492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카리브제도를 발전했다. 그는 이어진 3차례 항해에서 신대륙을 발견하고는 이를 인도라고 굳게 믿었다. 후에 그것이 미지의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포르투갈인 마젤란은 스페인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가 필리핀에서 살해된 후에도 동료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과거 포르투갈인이 지나온 항로를 비슷하게 따라서 스페인으로 되돌아왔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과 같이 서쪽으로 항해해도 예전 탐험가가 동쪽으로 항해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구 모양이라는 사실을 입증된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그리고 지리 및 천문학 역사에서 중요한 일대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 개척,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세계 일주 성공 이 미두는 유럽 자본주의 국가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자연과학이 한층 더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원양 사업이 발전하면서 항해사들은 선박의 위치를 결정하고 항로를 수정하기 위해 천체의 운동 방향과 고도를 이용했다. 이 때문에 기존 천문학의 관측 방법을 개량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는 천문학의 발전을 더욱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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