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멀고도 가까운 천문학

천문학자들 - 갈릴레이

by 녹스연구소장 2023. 1. 10.
반응형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97년 케플러의 주장에 명확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한 후에 그의 의문은 사라졌다. 1609년 7월, 네덜란드의 한스 리퍼세이가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얘기를 친구에게 들은 갈릴레이는 같은 해 8월 전해 들은 내용에 따라 확대율이 3배인 망원경을 직접 만들었다. 그는 관 모양의 기둥을 경통으로 사용하고 양쪽 끝에 각각 지름 5.6cm의 평면 볼록렌즈와 평면 오목렌즈를 끼웠다. 그리고 개량을 거듭하여 드디어 1609년 말, 그는 확대율을 갈릴레이 망원경의 최댓값인 32배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갈릴레이의 빛나는 업적은 확대율이 높은 망원경의 발명이 아니라, 이 망원경을 가지고 광활한 우주와 천체 운행을 관측함으로써 '망원경 천문학'을 창시했다는 점이다. 

갈릴레이의 동상

  먼저 달을 관찰한 갈릴레이는 달 표면이 스콜라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매끄럽고 아무런 결점 없는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마치 지구 표면처럼 울퉁불퉁하고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있으며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달 표면의 주요 산맥 두 개를 '알페스 산맥', '아페니노 산맥'이라고 이름 지었고 세계 최초로 달 표면 지도를 제작했다. 달 표면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변화를 관측한 갈릴레이는 달을 스스로 빛을 내지 않으며 달 표면이 밝은 이유는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망원경으로 행성을 관찰한 결과 행성은 맨 눈으로 관찰할 때보다 훨씬 크지만, 항성의 경우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사실로부터 행성은 지구에서 가깝지만 항성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예측했다. 은하는 무수히 많은 항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우주는 무한하다'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입증한 것이다. 1610년 1월 7일은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날이자, 천문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그는 망원경으로 목성에 위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며칠 동안 관찰한 경과, 그는 목성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는 위성 4개를 발견했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축소한 모습과 매우 닮았다. 

  이런 일련의 발견은 천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었고 태양중심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발견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발견이며, 심지어 거짓이고 날조된 것이라고 공격받았다. 갈릴레이는 1610년 그 해에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별세계의 사신'이라는 의미, 영어명은 'Sidereal Messenger'이다>를 1613년에는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를 발표했는데, 이 두 저서는 모두 자신의 발견을 주요 근거로 들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정확함을 직설적으로 밝혔다. 케플러는 갈릴레이를 지지하기 위해 <갈릴레이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와의 대화>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갈릴레이의 발견과 자신의 행성이론이 완벽히 일치한다고 밝혔다. 갈릴레이는 1632년에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대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발표했다. 이 책은 세 사람의 대화 형식을 취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갈릴레이를 반대하는 사람과 아리스토텔레스 추종 세력은 갈릴레이의 주장을 악의적으로 비방했고 그가 사악한 학설을 퍼뜨리면서 성경을 모독했다고 모함했다. 1616년 2월 26일,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을 열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고 철학적인 망상이며, 사악한 학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을 위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판결했다. 종교 법정은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로 공식 지정하는 한편, 갈릴레이에게 언어 또는 문자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옹호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설령 갈릴레이 한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진리마저 구속하지는 못했다.

  300여 년이 지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회복시켰다. 태양중심설은 이미 오래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갈릴레이의 억울함은 너무 늦게 해소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케플러의 저서에 자주 보이는 신학적 기하학과 '신비로운 조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새로운 천문학>에 등장하는 끝없는 계산 결과에 염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갈릴레이는 평생 원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하나의 구가 평면 위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는 없으며 반드시 매끄러운 수평면 위에서 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이 매끄러운 수평면은 구형이며 지구의 곡률만큼 구부러져 있다고 생각했다.

  뉴턴은 이 위대한 두 동시대 천문학자가 남긴 서로 다른 업적을 면밀히 분석하고 종합했다. 이를 위해 개념을 추상화하고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갈릴레이의 우주에는 여전히 '특권'적인 면이 남아 있다. 가령 지구 궤도 주위에는 지구를 움직이게 하는 구역이 있고 태양 주위에서 행성이 움직이는 구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사실과 다른 부분은 언젠가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무한한 공간으로 구성된 완벽하고 균형 있는 우주는 바로 기하학이다.

반응형

'멀고도 가까운 천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문학자들 - 케플러  (0) 2023.01.10
천문학자들 - 티코 브라헤  (0) 2023.01.09
천문학자들 - 코페르니쿠스  (0) 2023.01.09
라틴아메리카의 천문학  (0) 2023.01.08
유럽의 천문학 Part. 2  (0) 2023.01.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