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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천문학

천문학자들 - 티코 브라헤

by 녹스연구소장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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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페르니쿠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과거 천문학자의 관측 기록을 비판 없이 사용했으며,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자신이 직접 관측했다. 이때 관측 값의 정밀도는 그가 사용한 기기의 정밀도에 달려 있었다. 16세기 후반 몇십 년간, 티코 브라헤는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브라헤는 덴마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에 그는 남들처럼 일자리를 구하는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그는 직접 하늘을 관측하여 13세기의 <알폰소 목록>을 토대로 예측한 날짜가 한 달이나 차이가 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바탕을 둔 <프루테닉 행성표> 마저도 이틀이나 오차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정확한 천문 관측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관측의 정확성은 오직 관측하는 기기를 개량하고 관측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572년, 브라헤는 한 신성이 폭발하는 것을 관측했다. 그는 이 특이한 현상을 보면서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정확하다면 이런 현상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즉, 이 '유령'은 그동안 받아들여졌던 혜성에 관한 이론과 서로 모순이 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혜성이 지구와 성분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고 천체가 아니라 대기 중의 한 현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혜성에 관한 연구는 천문학이 아닌 '형이상학'에 속했다. 과거 천문학자들이 혜성을 관측하면서 높이를 거의 측정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브라헤의 관측은 신성과 같은 변화가 대기가 아닌 하늘에서 발생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다음번에 혜성이 나타나면 높이를 정확히 측정하여 혜성이 정말로 지구의 물질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브라헤는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1577년에 나타난 한 혜성을 관측했고, 이 혜성은 의심할 필요 없이 천체라는 결론을 얻었다. 더구나 이 혜성은 행성 사이의 공간을 자유롭게 운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등 과거 천문학자들이 묘사했던 천구 모형이 완전히 거짓임을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행성이 궤도 위에서 독립적으로 운행하는 천체라고 한다면, 혜성이 운행하는 원인을 규명하기란 매우 어려워진다. 그 결과 천문학자들은 이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력학을 버리고 운동학을, 기하학 대신 물리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1578년 티코 브라헤의 저서가 출판된 이후, 혜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엄연한 하나의 '천문 현상'이라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티코 브라헤의 연구를 통해 천문 현상은 반드시 더욱 정밀한 관측기기로 관측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이미 천문학계의 불변의 진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브라헤는 관측 기기와 관측 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덴마크 왕국을 설득한 끝에 드디어 국왕 프레데릭 2세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위치한 벤 섬에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 최초의 중요한 천문대를 건설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이곳 천문대에 점점 더 많은 훌륭한 관측 장비를 갖춰놓았고 아울러 관측 기술도 크게 끌어올렸다. 

  대대적인 관측은 1580~1590년대 초반에 실시되었는데, 브라헤가 이끄는 관측팀은 4일에 한 번씩 밤을 꼬박 새우며 관측을 했으며 주로 겨울철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브라헤는 관측 자체 못지않게 관측 기기의 성능 향상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많은 관측 자료가 제대로 분석을 거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벤 섬의 관측자들이 남긴 많은 자료는, 얼마 후 케플러가 행성의 운행 가설을 검증하는 데 소중히 사용되었다. 

  티코 브라헤를 적극 지원했던 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릭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새로 즉위하는 국왕은 그를 점차 신뢰하지 않았고 그를 계속 지원할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브라헤는 벤 섬에서 21년간 보낸 '천문학 밀월기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라하로 가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원을 받았다. 불행히도 다시 안정을 찾은 지 겨우 1년 만에 그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행운아였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29세의 청년을 제자이자 조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큰 재능을 가졌지만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케플러였다. 만약 브라헤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남긴 수많은 정밀한 관측 자료가 없었다면, 행성 운행에 관한 케플러의 3가지 법칙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일류 천문학자 케플러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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