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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천문학

천문학자들 - 케플러

by 녹스연구소장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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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코 브라헤의 후계자인 케플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운행하는 실제 궤도를 어떤 방법으로 측정할 것인가? 이는 마치 관측자가 '하늘 바깥'에서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둘째, 행성은 어떤 수학적 규칙에 따라 운행하는가?

케플러의 동상

  그는 이 두 가지를 위해 브라헤가 다년간 행성을 자세히 관측하여 남긴 수많은 자료를 철저히 연구했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기록을 수학적으로 자세히 분석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과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또는 브라헤가 제시한 제3의 학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 이론인지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수학적으로 계산을 했지만 케플러는 브라헤가 남긴 기록이 이 세 가지 학설과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희망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케플러는 문제점을 찾아냈다. 브라헤,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모든 저명한 천문학자와 마찬가지로 케플러 자신도 행성의 궤도가 원 또는 복잡한 원으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행성의 궤도는 원이 아니라 타원이었다. 

  기본적인 해결 방법을 찾은 후 케플러는 또다시 수개월 동안 복잡하고 지루한 수학 계산에 매달려야 했다. 그 결과 그의 학설과 브라헤가 남긴 관측 기록이 일치함을 증명해 냈다. 그는 1609년에 출판한 명저 <새로운 천문학>에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3법칙 가운데 두 가지를 발표했다.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은 '모든 행성은 타원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며 태양은 이 타원 궤도의 한 초점에 위치한다.'이다.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은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가까운 곳을 지날 때는 빨리 운행하고, 속도도 빨라진다.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선분은 같은 시간에 같은 넓이를 휩쓸고 지나간다.'이다. 10년 후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3법칙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태양으로부터 먼 행성일수록 공전주기가 길어진다. 공전주기의 제곱과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의 세제곱은 비례한다.'이다. 

  케플러의 법칙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행을 매우 완벽하고 정확하게 표현했으며 천문학의 한 가지 기본 문제를 해결했다. 이 기본 문제는 심지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와 같은 천재마저도 해결하지 못했다. 또 당시 케플러는 행성이 이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원인은 규명하지 못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뉴턴이 명확히 증명했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연구에서 우리는 만유인력 법칙의 초기 형태를 볼 수 있다. 즉, 케플러는 만약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면 만유인력 법칙을 충족하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행성의 궤도가 타원인 경우에 대해서는 증명하지 못했다. 이는 훗날 뉴턴이 복잡한 적분법과 기하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증명했다. 

  케플러가 천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코페르니쿠스에 뒤지지 않으며, 어느 면에서는 더욱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대답한 혁신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수학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계산기도 없어서 수학 계산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웠다. 

  케플러의 업적은 이처럼 매우 중요하지만 초반에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될 뻔했으며 심지어 갈릴레이와 같은 위대한 과학자마저도 처음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케플러의 법칙을 깎아내린 것은 의외이다. 왜냐하면 갈릴레이는 케플러와 편지를 교환했고, 그의 업적을 이용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반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케플러 법칙의 중요성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갈릴레이는 이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점점 더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다. 실제로 17세기말에 뉴턴의 학설을 지지하는 주요 학자들은 케플러 법칙이 뉴턴 학설에서 유도해낼 수 있으며 반대로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하면 케플러 법칙으로부터 뉴턴의 인력 법칙을 정확히 유도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려면 더욱 발전한 수학 기술이 필요했는데, 케플러 시대에는 아직 이런 기술이 없었다. 이처럼 기술이 낙후되어 있었지만, 케플러는 자신의 뛰어난 통찰력으로 행성의 운행이 태양의 인력에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케플러의 만년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의 대혼란 속에 빠져 있었고,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첫 번째 고난은 급여 문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국가가 비교적 융성한 시기에도 그에게 급여를 주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더구나 전쟁 기간에는 그의 월급이 차일피일 미뤄지기 일쑤였다. 케플러는 두 번의 결혼에서 자녀를 12명이나 두었는데, 이런 경제적 어려움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두 번째 고난은 그의 어머니가 1620년 무속을 행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체포된 사건이었다. 케플러는 많은 시간을 들여 어머니가 고문과 화형을 당하지 않도록 손을 썼고 결국 어머니를 구해냈다. 케플러는 1630년 레겐스부르크 제국자유도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무덤도 곧 소실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행성의 운행에 관한 법칙은 그 무엇보다도 찬란한 기념비가 되어  남아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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